[차한잔] 늑구

늑구가 우리를 빠져나갔다는 속보를 뉴스에서 처음 봤을 때, 화면 속 숲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십 개의 카메라 렌즈였다. 드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열화상 카메라가 어둠을 긁어 올리는 동안, 한 마리 늑대의 실루엣이 서성였다.
늑구는 야생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태어났다. 2008년 러시아 사라토프에서 들여온 늑대들의 3세대, 2024년 1월생, 이제 겨우 두 살짜리 수컷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철망 너머 관람객들의 시선을 먹으며 자란, ‘야생’의 후손이지만 정작 야생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몸.
그래서일까, 화면 속 늑구를 보는 동안 안쓰러움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 아이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발로 길을 걸어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우리에게는 그저 ‘탈출한 개체’지만, 늑구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철망도, 급식 시간표도, 정해진 동선도 없는 밤이었을 것이다.
동물원은 늘 안전을 약속한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먹이, 비를 막아주는 지붕, 병들면 찾아와 주는 수의사. 대신 늑대는 사냥하는 법을 잊고, 무리를 짓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사육사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도 어쩌면, 그런 식으로 조금씩 길들여지며 자라온 건 아닐까.
태어나자마자 어디 소속인지부터 묻는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이름보다 소속을 먼저 말하는 법을 배운다. 학생, 인턴, 정규직, 가장, 혹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사람. 본성이나 성향 같은 건 이력서 한 칸에 들어갈 만큼만 요약하고, 남은 부분은 서랍에 밀어 넣은 채 “이 정도면 괜찮지”를 반복하며 산다.
늑구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도 잠깐은 생각했다. 숲 어딘가에서, 인간의 눈을 피해 진짜 늑대로 살아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곧 현실은 마취총이 되어 날아간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말은 늘 설득력이 있고, 그 말 앞에서 자유는 쉽게 죄인이 된다. 마침내 늑구는 쓰러지고, 다시 동물원으로 옮겨진다.
우리는 늑구를 보며 안타까움을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만큼의 연민을 건네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젠가”라는 단어 뒤로 미뤄두고, 오늘의 급여와 오늘의 안락함을 위해 한 수 접는 선택을 반복한다. 그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고 서로를 설득하면서.
밤길에 서 있던 늑구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다. 차의 전조등이 닿는 좁은 원 안에서, 늑대는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야생이라 부르기엔 애매하고, 동물원이라 부르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자리. 어쩌면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그런 중간 지대에 멈춰 서 있는 건 아닐까.
늑구는 결국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갔고, 뉴스는 “건강 이상 없음”이라는 자막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화면이 꺼진 뒤에도, 내 안에서는 한참 동안 울타리 긁는 소리가 났다. 철망을 긁는 늑대의 발톱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야생(나를 찾는 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타의로, 또 자의로 포기해온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늑구의 탈출은 끝났지만, 우리 각자의 탈출은 아직 시작도 못 한 채, 쓸쓸한 밤마다 마음속에서만 몇 걸음씩 허공을 걸어본다.
https://youtu.be/DX9JNJThhxY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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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는 모든 동물원과 수족관들을 폐쇄하는 방향으로 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