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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미의 이름 오디오북 감상.

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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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5
Updated at 2023-03-06 08:57:04

며칠 전 장미의 이름 오디오북이 나와서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푸코의 진자를 읽은 후라 지적 호기심이 욕망으로 변질되는 과정의 추리극에 몰입했습니다. 오늘 새벽 달리기를 하면서 듣자니 추리극은 장식이고, 실체는 복잡한 정치 드라마입니다. 지금껏 이해한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배경은 1420년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경계 지점 모처의 수도원입니다.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파와 교황파 사이에 회담이 이뤄집니다. 주인공 윌리엄 수사는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외교 자문으로 회담을 무사히 성사시킬 임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회담장인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납니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치안을 빌미로 프랑스군대가 회담에 개입할 겁니다.


이 당시 교황은 바티칸에 있지 않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습니다. 아비뇽 유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포로로 잡혀있는 게 아니라, 프랑스에 있는 것이 유리했기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교황과 프랑스왕은 서로 협력하고 거래하며 정치적 위상을 올렸습니다. 로마로 돌아가라고 해도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황제쪽은 속이 탑니다. 루트비히 4세는 로마에 대립교황까지 세워가며 교황을 견제하지만, 수완 좋은 교황 요한22세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작중 화자 아드소가 다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교황이 나오지 못할 거라며 저주하는 이유입니다. 아드소의 아버지는 황제의 봉신이죠. 사람 좋고 서민적인 걸로 유명한 교황 요한 23세가 나오기 전까지 500년 동안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교황은 없었습니다.


실체는 황제와 교황의 정치적 대립이지만, 외면적으로는‘청빈’을 가지고 싸웁니다. 부와 권력을 타도하며 청빈한 예수의 삶을 본받자는 개혁론이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되면 청빈도 권력의 무기가 됩니다. 황제가 내세운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는 이 청빈 이념의 주동 세력이 된 프란치스코회에 힘을 잔뜩 싣습니다.. 


00825-1036740812-In a medieval monastery, the abbot and an old monk are engaged in a heated debate. The monk is gesturing wildly and shouting lou.png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보편적인 운동이 되면서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프란치스코회를 참칭하니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한쪽에는 윌리엄 수도사와 같은 지식인이 있지만, 또 다른 극단에는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극렬조직이 있습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원장들은 교황도 싫지만, 프란치스코회의 극렬 청빈론자는 더 싫습니다. 청빈, 말은 좋지만 모든 기득권을 타파하자는 현실부정론이기도 합니다. 영주나 다름없는 부와 권력을 가진 수도원장이 반길리 없습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쓰는 교황이 최근에 처음 나온 것도 이 청빈논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00826-1036740813-In a medieval monastery, the abbot and an old monk are engaged in a heated debate. The monk is gesturing wildly and shouting lou.png


2.

청빈 이념이 무기화되고, 극렬 분자들이 청빈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역설을 현실에서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예송논쟁과 조광조의 부침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사림파를 전위에 내세워 반대파벌을 숙청하는 모습은 전형적이기도 합니다. 여튼, 움베르토 에코 선생은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꼬이고 꼬였을 상황을 고르고 골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80년. 그때 이탈리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알도 모로 전 총리 납치 사건이 1978년에 있었습니다. 알도 모로는 중도 좌파로 기독교 민주당에서 총리를 두 차례, 외무, 법무, 교육부 장관을 돌아가며 맡았던 인물입니다. 패전국 이탈리아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사회보장 확대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대학 시절 부터 친분을 쌓아온 온화하고 지적인 인물입니다. 중재하고 화해하고 협상하는 정치인이 어떤 취급을 받을까요. 여운형처럼 죽거나, 살아 남아도 좌우파 모두에게 욕을 먹습니다.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련과 관계를 끊은 뒤, 36%득표를 하는 역사적 대약진을 합니다. 공산당이 주류 정당이 된 것입니다. 알도 모로 총리는 공산당과의 대연정을 주장하다 실각합니다. 


그리고, 1978년 극좌조직 붉은 여단에게 납치당합니다. 납치범들은 현장에서 총탄 40발로 경호원 5명을 죽이고 모로를 납치했습니다. 교황의 수차례 탄원했지만, 모로는 55일뒤 11발 피격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모로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화해하고 중재하며, 타협하는 협상가이기 때문에 살해한 것입니다. 붉은 여단 입장에서는 화해를 말하는 사람이 적입니다. 갈등이 고조되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마침내 폭력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모로같은 중재자가 화해하면서 치이익 김을 빼고 있는 것입니다. 


모로를 살해하며 붉은 여단은 단기적인 정치적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민주당과 공산당과의 협상은 즉각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시민은 공산당을 버리고 더 온건한 사회당을 선택합니다. 1983년 공산당 대신 사회당이 처음으로 집권합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쇠락하다 1991년에는 해체됩니다.


3.

이런 배경을 알면, 황제와 교황의 협상을 이끄는 윌리엄 수도사가 다르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윌리엄은 청빈을 부정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장을 논리로 격하게 몰아 붙입니다. 수도원장이 근거를 하나하나 댈 때마다 그 근거의 실체를 까발리며 주장이 서 있는 자리를 흔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먼저 사과하며 물러납니다. 상대를 꼼짝달싹할 수 없는 논리적 코너에 몰아넣지만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먼저 물러서며 상대가 피해갈 길을 마련해 줍니다. 때때로는 먼저 사과하고, 때때로는 웃음으로 공감대를 만듭니다. 유능한 협상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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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지금까지 어린애 같았던 아드소가 스승 윌리엄의 허점을 지적합니다. 진보파 수도사와 대화할 때에는 청빈 분파의 이단성을 지적하다가, 보수파 수도원장과 대화할 때에는 청빈이 이단이 아니라고 거꾸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논리적 문제라며 설명을 합니다. 큰 강물이 바다에 이르렀을 때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가. 그러나 이전까지 명쾌하고 단호하던 태도와 다릅니다.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이 지적을 기점으로, 윌리엄의 탈 인간적인 천재성에 맞춘 초점이, 잘난 척하고, 짜증도 잘 내며, 쌍욕도 하는, 윌리엄의 인간적인 면으로옮겨집니다. 


타협해야 하는 협상가는 아주 가는 줄 위를 걷는 것이죠. 예전에 읽을 때는 추리소설 비슷했던 책 내용이 빅딜 협상 앞의 실무자를 다룬 정치극으로 바뀝니다. 이 책이 워낙 유명했던지라 살인극의 범인이 누군인지는 다 압니다. 황제와 교황의 협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600년 전 일을 말해도 스포일러가 되려나요. 


지성으로 쌓아올린 화해의 탑이 열정적인 바보에게 불타올랐다고만 하겠습니다. 이런 실패는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니며, 역사 곳곳에서,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사일 겁니다. 끝없이 이어져 온 패배의 역사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4.

오디오북으로 듣는 장미의 이름도 훌륭한 독서 체험이지만, 장면 묘사에 맞춰 AI로 삽화를 만들어 가며 독서를 합니다. 뭔가 그럴싸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발가락이 없거나 너무 많거나, 얼굴이 없죠. 이런 이미지들이 에코의 책과 잘 어울립니다. 

00855-1800229627-A medieval monk, resembling Sean Connery, is ascending a tall staircase, making his way up to the tower. The candles flicker in.png

앞으로는  펼칠 때마다 다른 배경음악과 삽화가 나오는 AI 서적도 나올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까요. 


11
댓글
박 PD
2023-03-05 23:57:49

어디서 찾아 들을 수 있나요? 저도 좋아하는 영화였기에..ㅎ

WR
분도
2023-03-05 23:58:52

이건 welaaa.com에서 서비스합니다.

단신듀엣
1
Updated at 2023-03-06 00:07:02

세상을 보는 기준이 상황과 사람에 달라지는 휘어지는 잣대다??

그걸 지닌 사람은 편할겁니다. 척추를 비롯해서 자세를 바로잡는게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죠 그런데 불편함을 뒤로하고 편함을 추구하면 자세는 무너지고 척추,골반,무릎 관절 모두

뒤틀리고 썩게 됩니다. 

 

편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항상 자세나 정신을 바르게하고 이중,삼중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이 우릴 녹슬게 하지 않죠. 

 

좋은 서평 잘 봤습니다.

단신듀엣
Updated at 2023-03-06 00:46:24

아 그리고 저는 저 청빈이라는 단어가 현재는 진보 혹은 보수에 부합되는것 처럼 보인다고 적는걸 깜빡했네요. 이념을 던져두고 그걸 방패삼아 사리사욕과 부패한 권력을 향유하는 것들이 많죠 

Running9
2023-03-06 00:32:16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장미의 이름 오디오북 감상.

gb_world
2023-03-06 00:34:25

앞으로도 좋은 책들 많이 추천 부탁드려요 

탈리샤샤_술 안 마심
Updated at 2023-03-06 00:43:46

에코의 책은 불친절한 면이 있어서 이런 배경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해설 감사합니다. 

rated R
2023-03-06 00:48:39

소시적에 소설하나 가지고 몇달을 씨름했던 경험이있습니다.

잘 이해되지도 않았던 소설을 억지로 읽어보려 했던건 뭔가 지적 허영심을 채울 욕심이었다는 생각...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소설의 분위기와 내용이 연상되는 걸 보면 걸작임은 맞는것 같습니다.

 

장자크아노의 영화는 소설에서 느꼈던 것과.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블루시엘
2023-03-06 00:55:21

제가 좋아하는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소설이라서 너무 반갑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관심
1
2023-03-06 01:52:30

중간에 제일 눈에 띄는 문장은 이거네요.

"중재하고 화해하고 협상하는 정치인이 어떤 취급을 받을까요. 여운형처럼 죽거나, 살아 남아도 좌우파 모두에게 욕을 먹습니다."

말씀에 대체로 동감합니다만, 2차대전 직전의 영국 수상 체임벌린의 사례 때문에 그 말씀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어서 참 어려운 일입니다. 

변화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우리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을까요? 

소용돌이
2023-03-06 11:04:22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 예전에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었는데요. 다시 꺼내서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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